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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ZAC Day – 오스트레일리아가 전쟁을 기억하는 하루

by 리베원 2025. 5. 24.

 

 

매년 4월 25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전역은 정적 속에 깨어납니다. 이번에는 ANZAC Day – 오스트레일리아가 전쟁을 기억하는 하루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어둠이 가시기 전, 수많은 이들이 공원, 전쟁기념관, 해변에 모여 ‘새벽 추모식(Dawn Service)’에 참여하며 침묵 속에 고개를 숙입니다. 이날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ANZAC Day(앤잭 데이)’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추모의 날입니다.

 

ANZAC Day – 오스트레일리아가 전쟁을 기억하는 하루
ANZAC Day – 오스트레일리아가 전쟁을 기억하는 하루


ANZAC의 탄생과 갈리폴리 전투: 피로 새긴 연대의 시작

‘ANZAC’은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연합군단)의 약자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제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이들 두 나라는 1915년 4월 25일,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리 반도(Gallipoli Peninsula)에 상륙 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 작전은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전쟁을 빠르게 종결짓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8개월간의 참호전, 혹독한 자연환경, 수많은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각각 약 8,700명과 2,700명의 사망자를 기록했고, 부상자와 실종자 수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두 나라에게 단순한 전쟁 이상의 의미를 남겼습니다.
바로 국가 정체성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는 연방으로 독립한 지 겨우 14년밖에 되지 않았고, 뉴질랜드 역시 영국의 자치령이었습니다. 갈리폴리에서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두 나라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전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ANZAC 군인들의 용기, 희생, 동료애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이후 두 나라 역사에서 국가적 정신의 상징이 되었고, 4월 25일은 이를 기리기 위한 공식 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새벽 추모식과 퍼레이드: 애도의 형식이 된 일상

오늘날 ANZAC Day는 군인에 대한 존경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날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행사는 ‘새벽 추모식(Dawn Service)’입니다. 이 전통은 실제로 갈리폴리 전투에서 병사들이 새벽에 가장 경계를 높였던 시간에서 유래하였으며, 현재는 전국 각지에서 수천 명이 새벽 4~5시에 모여 조용한 묵념과 기도, 군악대의 연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추모식에서는 “They shall grow not old, as we that are left grow old...”로 시작하는 로렌스 비니언의 시 구절과 함께 “Lest we forget(우리가 잊지 않도록)”이라는 문장이 반복되며, 기억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날은 세대를 넘어 모두가 참여하는 시민 의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오전에는 도심 퍼레이드가 이어지며, 재향군인들과 현역 군인, 소방대원, 경찰, 학생들까지 다양한 단체들이 깃발과 유니폼을 입고 행진합니다. 그 뒤를 따라 각 전쟁에서 희생된 유족과 일반 시민들도 함께 걷습니다. 이 퍼레이드는 단순한 군사 행진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함께 기억하고, 함께 걸으며 과거를 나누는 과정입니다.

또한, ANZAC Day에는 전통적으로 ‘투업(Two-up)’이라는 도박 게임도 합법적으로 허용됩니다. 이는 과거 병사들이 지루한 전선 생활 중에 즐기던 놀이였으며, 전통을 존중하는 문화적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ANZAC Day는 단순한 기념일이 아닌, 형식과 의식이 응집된 사회적 연대의 날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억하고, 되새기고, 전승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전쟁기억의 현재적 의미: 영웅주의 너머의 성찰

ANZAC Day는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애국심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전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현대에는 전쟁의 공포와 인간적 상처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며, 단순히 ‘영웅을 찬양하는 날’로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시선도 늘고 있습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ANZAC Day의 역사와 의미를 배우고, 기억의 중요성을 교육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와 평화의 가치에 대한 교육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이 날을 단순한 군국주의 기념일이 아닌,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ANZAC Day가 단지 과거에 머무르는 행사가 아니라, 현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날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가적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기억하며 새로운 시민의식을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또한, ANZAC Day는 오스트레일리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뉴질랜드와의 형제애,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던 터키와의 화해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날 갈리폴리 지역에서는 양국의 대표가 함께 추모식을 열며, 과거의 적이 현재는 친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도 자주 연출됩니다.

 

ANZAC Day는 단지 군인의 날이 아닙니다. 모든 희생자, 그리고 그 가족과 사회 전체가 함께 기억하는 날입니다. 전쟁의 상처를 넘어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묻는 이 날은 국가 정체성과 시민의식을 단단히 연결해주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잊지 않도록(Lest We Forget)”이라는 문장은 단순한 문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고,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공동의 약속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나아가는 선언입니다.